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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락 장로님 이야기

글쓴이 : 새누리 날짜 : 2016-03-01 (화) 09:46 조회 : 1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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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락 장로님 이야기
양재원  (ID:jaewony,IP:64.54.30.9) 2015-03-23 13:17:48 1870 1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3202

 

한국의 대표적인 목회자 한경직 목사가 시무했고, 한국 장로교와 한국 교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영락교회(한경직 목사)가 일부 장로들의 담임목사에 대한 비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행히 노회수습전권위의 중재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고 있다.
 
다음의 글은 한국 전쟁 당시의 한경직 목사와 장로들의 실화를 기록한 글이다. 조성기가 쓴 <한경직 평전>(김영사 간)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한경직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애쓴 장로들과 한경직 목사. 그리고 교회를 지키다 순교한 김응락 장로. 영락교회 장로들과 한국 교회에 다시금 목사와 장로의 관계를 생각하게 해준다.
 
"담임목사가 교회를 지키지 않고 피난갈 수가 있어요?. 그러면서 참 목회자라 할 수 있어요?"라고 항의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는 우리가 지킬 테니 어서 피난가십시오"라고 등을 떼밀며 한경직 목사를 피난가도록 하는 장로들의 목회자 사랑과 교회 사랑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생명을 바친 장로들이 있었기에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가 한국 교회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은 <한경직 평전>에 나오는 일부분이다.
 
6월 25일 주일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4천여 성도들이 석조전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38선 부근에서 공산군과 국군이 서로 충돌하는 사건이 있었다는 뉴스를 방송과 신문으로 들은 교인들이었지만 모두들 흔히 있는 국지전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 찬양 예배로 모였을 때는 교인들도 이번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경직은 교인들의 두려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어느 때보다 강한 어조로 말씀을 전하였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어떠한 불행이라도 의로운 사람에게는 그것이 행복으로 바뀌도록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을 당할 때일수록 우리가 더욱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날 저녁, 서울 시내에서도 대포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쿠르쿵.
 
멀리서 울리는 천둥 같기도 한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크게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교계 지도자들이 이틀에 걸쳐 종로 기독교서회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북한군이 미아리까지 쳐들어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화요일 저녁, 기독교서희 대책회의를 마친 후 경직은 교회로 와서 엎드려 기도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공산당을 피해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또 공산당이 쳐들어왔습니다. 제가 더 이상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여기 있다가 순교하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그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어스름이 내릴 무렵, 김치복을 비롯한 장로 몇 사람이 교회로 경직을 찾아왔다.
 
 "목사님, 오늘 저녁에는 공산당이 서울 시내로 진입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빨리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공산당이 서울에 들어와 누굴 맨 먼저 찾겠습니까? 목사님 같은 분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순교도 각오한 몸입니다. 이번에는 공산당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예배당 입당식을 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교회를 버려 두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이북에서 공산당을 겪어 보셔서 잘 아실 것이 아닙니까? 목사님의 목숨은 목사님 한 분만의 것이 아닙니다. 영락5천 성도와 한국 수백만 교인들을 돌보아야 할 목자로서 공산당에게 죽임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임시라도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그들은 경직을 억지로 끌다시피 하여 청파동에 있는 김성호 석탄공사 총재 집으로 데리고 갔다. 김성호 총재의 부인이 영락교회 권사로 있어 그곳으로 일단 몸을 피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들은 밤새도록 불안한 마음을 안고 이야기를 나누며 기도하였다.
 
새벽2시가 좀 넘어 한강 쪽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것이 한강 다리가 폭파되는 소리인 줄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어떻게 국군이 수천 명의 피난민들로 가득한 한강 다리를 폭파할 수 있겠는가. 한강 이북에 있는 수많은 국군들도 아직 철수하지 못하고 있는 판이었다. 
 
그날 한강 다리 폭파로 다리 위에 있던 피난민과 군인 천여 명이 삽시간에 죽고 말았다. 그것도 아무 사전 경고도 받지 못한 가운데 아군의 손에 당하고 만 것이었다. 한강 이북에 있던 4만 4천여 명의 국군들도 한강 다리 폭파로 인하여 퇴로를 잃어버리고 죽거나 실종되었다.
 
아침이 되자 거리에서 묵직한 쇠바퀴 굴러가는 소리 같은 것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경직 일행은 한 청년을 시켜 바깥 거리 동정을 살펴보고 오도록 하였다. 그 청년이 다시 돌아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산군 탱크들이 청파동 앞길까지 쳐들어 왔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영락교회 동사목사 강신명도 장로들에 의해 끌려왔다. 경직 일행은 공산군이 서울로 깊이 진입해 버렸는데 피난할 길이 있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직은 집에 있는 아내와 순희, 혜원, 보린원 아이들이 걱정되기도 하였다.
 
마침내 김성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 지금 공산군이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아직 어수선한 때이니 일단 한강둑으로 나가봅시다."
 
모두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뒤쪽으로 해서 마포로 나가 보았다. 마포 형무소가 폭파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공산군이 죄수들을 풀어주기 위해 형무소를 폭파하는지, 국군이 죄수들을 감방에 가둔 채 폭파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강다리가 끊어져 피난을 갈 수 없는 사람들이 마포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배들은 적고 사람들은 많아 경직 일행은 아침부터 정오까지 둑에서 기다려도 배를 얻어 탈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 사공 한 사람이 나룻배를 저으며 경직을 유심히 살폈다.
 
 "이거 한 목사님이 아니십니까? 제가 건네 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가까이 다가와 나룻배를 둑에 대었다.

 "일행이 있습니다.'
 경직이 고맙다는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몇 분이나 있습니까?"
 "대여섯명 됩니다."
 "그 정도면 충분이 탈 수 있습니다. 어서 타십시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배를 타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폭파된 한강다리 쪽에서 시신들이 둥둥 떠내려오고 있었다. 
 
경직은 한강만 건너면 거기에 수많은 국군들이 방어진을 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국군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패잔병들만 허겁지겁 피난민들에 섞여 달아나고 있었다. 얼마나 마음이 허탈하고 실망스러웠는지 몰랐다.

경직이 정신없이 안양 쪽으로 피난을 가고 있는데, 시흥 국민학교 앞에서 어떤 군인들이 쫓겨가는 패잔병들을 불러모아 학교로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 맥빠진 군인들을 불러모아 어떻게 하나 하고 경직도 국민학교 교정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 오산학교 1년 선배인 김홍일 장군이 있는 것이 아닌가.
 
김 장군도 사관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후퇴를 하였는데, 이러다가는 안되겠다 싶어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백전노장의 관록을 살려 패잔병들을 모아 한강 전투로 재배치 하고 있는 것이었다. 김홍일 장군의 그런 모습을 보고 경직은 다소 마음이 놓이기도 하였다.
 
맥아더 장군도 그 다음날 일본에서 전용기를 타고 수원 비행장으로 한강 근처까지 가서 전황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아직도 한강을 지키는 군인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한국을 도와주기로 마음먹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제24사단을 급히 파견하였다. 물론 맥아더는 수천 명의 국군들이 피난민에 섞여 정신없이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모습들도 보았다.
 
민족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을 때 나라의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속이고 한강 철교까지 폭파하고는 달아나기에 급급하였지만, 김홍일 장군은 그 와중에서도 군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었다. 바로 이런 정신을 남강과 고당 선생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시흥에서 다시 안양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군인들을 실은 트럭 하나가 경직 옆에 와서 멈췄다. 경직이 무슨 일인가 하고 트럭을 쳐다보니 소위 계급장을 단 장교 한 사람이 트럭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목사님, 저예요, 빨리 트럭에 타세요."
 
그 장교는 영락교회 집사로 있는 김건이었다. 그리하여 경직 일행은 그 트럭을 타고 안양으로 와서 나흘쯤 머물렀다. 그때 김건은 정훈국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민심 수습 차원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시국 강연 같은 것을 해야만 하였다. 그의 요청에 의하여 경직도 피난민들을 상대로 시국 강연을 몇 번 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니 어떤 시련에도 낙망하지 말고 마음을 굳게 먹자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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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로 들어온 경직은 끊어진 한강 다리 근처에서 영락교회 장로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김응락 장로가 교회 구내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경직에게 알려주었다.
 
김응락은 신의주 제1교회에서 12년간 봉사하다가 해방되기 전에 서울로와 여관업과 포목상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는 고아원과 양로원들을 지원하는 한편, 재정난에 허덕이던 <기독공보>를 인수하여 기독 언론 창달에도 힘썼다. 안동교회 장로로 헌신하다가 경직이 남한으로 내려와서 교회를 세우자 아직 마땅한 건물도 없는 영락교회로 와서 봉사하였다. 특히 석조전 본당을 짓는 데 누구보다 물심 양면으로 헌신적이었다.
 
김응락 장로는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그대로 남아 교회를 지켰다.
 
 7월 2일, 6.25 전쟁 후 첫 주일에 그토록 주일 성수를 강조하던 서울 시내의 교회들은 거의 모두 문들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영락교회는 담임목사와 동사목사가 없는데도 여전히 교회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그날 새벽에 유년부 부장 박동엽 장로가 교회로 와 옆문으로 들어가서 대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교회 구내에 살고 있던 어느 집시가 박 장로를 나무랐다.
 
 " 지금이 어느 때인데 교회 문을 여는 거요?"
 
 박장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주일 날 예배당 문을 닫아두다니 될 말이오? 활짝 엽시다. 죽어도 열어놓고 죽읍시다."
 
 그러고는 베들레헴 성전에 모인 수십 명의 어린이들과 어린이를 데리고 온 몇 명의 부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박 장로는 그 어린이들 앞에서 순교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 육신을 죽이는 자보다 영혼까지 죽이는 자를 더욱 두려워합시다."
 
 주일 예배를 마친 교인들은 오후에 김응락 장로 집에 보여 아무리 전쟁중이라 하더라도 교회 문은 닫을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주일 예배 사회는 시무장로가 맡고 설교는 아직 피난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는 목사에게 부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런 목사들은 신변 위험을 이유로 설교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 다음 주일부터 인민군들이 영락교회를 군대 무기고로 접수하고 말았다. 돌로 튼튼하게 지어진 석조전이 무기를 보관하기에 작정하고, 무엇보다 예배당에 무기를 감추어 두면 국군과 미군들의 눈을 속일 수 있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 전파되는 예배당이 동족을 죽이는 무기들로 가득하게 되다니, 인민군의 무기고를 만들기 위해 그토록 교인들이 희생적으로 헌금하고 수고했단 말인가.
 
 영락교회 교인들은 승동교회를 빌려 예배를 보곤 하였으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 각자 자기 가정에 숨어서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신앙을 지킬수 밖에 없었다. 김응락 장로는 몰래 심방을 다니며 교인들을 격려해주었다.
 
인천 상륙작전을 며칠 앞둔 9월 24일. 김응락은 교회 근방에 있는 교인을 심방하러 가다가 예배당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상황이 어떤가 하고 다가와 살펴보았다. 그런데 교회 문이 굳게 잠겨있고 교회 구내는 인민군들이 철수하였는지 조용하였다. 그래서 구내에 교인들이 있으면 문을 열어줄까 하고 교회 문을 두드려 보았다. 그러자 고필용 장로 부인이 구내에 있다가 급히 달려나와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돌아가세요, 아직도 인민군들이 예배당 안에 있어요."
 
그와 동시에 인민군 하나가 총을 들고 달려와 김응락에게 총을 겨누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김응락이 지체없이 대답했다.

 "나는 이 교회 장로다."
 
 김응락은 곧바로 중부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얼마 있으니 김인모 장로의 아들 김만이라는 청년도 끌려왔다. 그때 이미 김응락은 여기저기 얻어터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취조가 끝난 후 인민군은 김응락과 김만에게 수갑을 채운 채 다시 교회로 끌고 가 계단을 올라가도록 하였다. 계단을 다 올라가면 본당 남쪽으로 빈 터가 있는데 거기서 총살 당하리라는 것을 두 사람은 예감하였다. 그때 구내에 있던 전성천 목사의 장모가 김응락을 보고 달려내려와 계단 중간쯤에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만을 앞세우고 올라가던 인민군이 계단 끝에 이르러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김응락에게 빨리 올라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래도 두 사람이 계속 말을 주고받자 화가 난 인민군이 달려 내려왔다. 그 순간이었다. 김만이 수갑을 찬 채 온 힘을 다해 달아나고 말았다. 
 
김만을 놓친 인민군은 금방이라도 총을 쏠 듯이 흥분하며 김응락을 끌고 가려 하였다. 김응락이 간곡하게 인민군에게 부탁하였다.
 
 "5분만이라도 예배당에 들어가 기도하고 나오게 해주시오."
 
 결국 인민군은 마지막 5분의 기도 시간을 허락하였다. 김응락은 석조전 예배당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천장 한쪽이 무너져 있고 바닥에도 구덩이가 패어 있었다. 인민군 무기고라는 것을 눈치채고 미군이 폭격을 했는지도 몰랐다. 무기들은 이미 철수를 했는지 잘 보이지 않고 화약냄새만 진동하였다. 교인들이 많을 헌금을 드리고 그것도 모자라 사재를 털어 가면서까지 세운 예배당의 처참한 모습 앞에 김응락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김응락은 교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수갑을 찬 두손을 모았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신 예수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지금까지 살아온 44년의 세월과 신앙생활에 헌신해온 29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피난준비를 하고 있을 아내와 영걸, 영철 두 아들, 그리고 시집간 딸 성애의 얼굴이 말할 수 없이 보고 싶어졌다.
 
 "주여, 이 나라와 이 교회와 우리 가족과 내 영혼을 당신께 부탁하나이다."
 
인민군은 김응락을 본당 남쪽 빈 터로 끌고 가 무릎을 꿇게 하였다. 수 천명의 교인들로 웅성거리던 교회 뜰에 그 시간에는 김응락 혼자 밖에 없었다. 인민군의 차가운 총부리가 김응락의 머리에 와닿았다.

 "탕!"

 총성이 한 번 크게 울렸다.